성당 주보에 가끔 맘에 드는 글이 올라옵니다. 이 글도 그 중 하나이고요.
이런 글 볼 때마다 중학교 때 돈이 없어서 학업을 그만두고 공장에 취업한 친구가 생각나네요. 교육과 의료부문이라도 공공화가 되면 우리의 삶이 지금처럼 팍팍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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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정하다고 욕먹을지 모르겠지만요, 치료비가 없는 병자, 진학 못한 어린 가장을 소개하며 전화 기부를 권하는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 저는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딱한 사연에 다이얼을 돌리는 착한 마음들이 그토록 많은데도, 사회가 그런 어려움을 풀어 내는 제도는 좀처럼 마련되지 않는 현실 때문입니다. 이런 방송들이 눈물과 자선으로 국민을 생생하게 달래는 사이에, 누구나 능력대로 살게 해야 시장도 잘 돌아가고 나라도 부유해진다는 논리가 득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일전에 가톨릭 신자인 문화관광부 관리자 한 분을 만났더니, 선진국을 따라잡을 때까지 한 이십 년은 떡을 더 키우고 그 다음에 나눠 먹어야 한다고, 그게 다수의 뜻이기도 하다고 말하더군요. 이십 년이라, 어디서 들은 말인 듯했습니다.
저는 1980년대 초에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봐야 몇 년 못 버텨 부끄러운 이력으로만 남았습니다. 한 아이가 여러 날 결석해서 집을 찾아갔습니다. 지금은 지하철 2호선을 끼고 있는 도림천변 동네에서, 관절염을 앓고 있는 어머니만 집을 지키고 누워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일러 주는 대로 근처 타이어공장에 가서 노동자가 된 아이를 만났습니다. 얼굴 한쪽이 몹시 부어 있어서, 억지로 치과에 끌고 가 엉망이 된 어금니 둘을 뺐습니다. “어떻게, 학교는 다시 다닐 방법이 없겠니?” 하고 죄지은 심정으로 물었습니다. “엄마 병원 갈 돈은 벌어야죠. 누나도 일해요.” 아이는 결국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 분노의 표적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뒤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가난하면 학교도 병원도 다닐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님을 알고는 놀랐습니다. ‘선진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소득이 비슷한 많은 나라들도 교육과 의료는 사회가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지인들에게 보내는 엽서에 그런 이야기를 쓰면, 말을 맞추기나 한 듯 “이십 년쯤 지나면 우리도 그렇게 되겠지” 하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귀국하고 몇 해가 흐른 뒤, 제자들을 만나는 자리에 어른이 된 그 아이가 왔습니다. 학교는 그 때 중학교만 마쳤고, 난방관련 일을 배워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제 시선은 다 무너진 치열에 가 있었습니다. 한참을 참다가 물었더니, 빈 자리를 대충 메운 것이 십 년 전이라고 하더군요. 그 때까지 다른 이도 다 망가졌겠지요. 그 치열만큼이나 들쑥날쑥했을 제자의 인생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그 옛날 어떻게 해서라도 채워 넣어 주지 못한 것이 말할 수 없이 미안해서 자꾸 눈물이 났습니다. 제자의 자식들에게 다시 이십 년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제게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더는 미루지 말고 나누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제때에 비를 내려 주리니, 그 비가 복이 될 것이다”(에제 34,26)처럼, 약한 자의 눈물을 미루지 않고 닦아 주신 예수님처럼….